사도행전 21장 27-36절 “그래서 복음, 그럼에도 복음”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93 viewsNotes
Transcript
주일설교(20230903-사도행전27 - 고난 가운데 전하는 복음)
성경: 사도행전 22:1~30
❍ 들어가기
사도행전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과정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신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을 아끼는 지체들이 그를 말립니다. 이유는 그가 받게 될 ‘결박과 환난’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지체들의 만류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결박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했노라’ 선언합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를 예방합니다. 야고보 역시 바울을 아끼고 사랑했기에, 예루살렘에 퍼져 있는 바울을 향한 거짓 정보들을 걱정하고, 바울에게 ‘율법을 거스르고 유대의 전통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실인의 정결례를 치르는 4명의 지체들과 바울을 동행하도록 권면합니다.
사도행전 21:23–24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민수기 6:13~15절에 의하면, 나실인 서원 기간이 만료된 사람은 성전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정결예식인 결례를 행하고, 제8일에는 머리를 깎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권면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 본문으로
1. 악한 의도(거짓말)로 충동질 하는 사람들
그런데 성전에 있는 바울을 발견한 악한 사람들이 사람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사도행전 21:27~29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지금의 트루키에 동쪽 지방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입니다. 특별히 3년간 복음을 전했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이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을 충동합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충동하며 주장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바울이 ‘각처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이 ‘헬라인 즉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바울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스스로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자기 동족을 사랑했고,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로마서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 ‘스스로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골육의 친척,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육신적으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이 ‘각처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여 가르쳤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충동한 이들의 주장은 거짓말입니다.
또한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고 선전에 들어가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헬라인인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성전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바깥뜰로, ‘이방인의 뜰’로 불렸습니다. 이방인은 거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방인이 그 너머에 있는 성전의 안뜰, 즉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면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당국 역시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금기 사항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설령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방인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바울 역시 성전을 더럽힌 성전 모독죄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성전에 들어갔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나실인의 결례에 동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더구나 ‘나실인’으로 스스로를 성결하게 지켰던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도행전 21: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 다만 유대인들이 그들의 거짓 충동에 반응했던 이유는 바울이 지금 함께 있는 사람 ‘에베소 사람 헬라인 드로비모’가 지금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충동했던 사람들에게 ‘사실이나 진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배교자 바울을 공개적으로 죽여 버릴 수 있는 명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내세운 두 가지 거짓 죄목에 예루살렘 유대인들 사이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도 사실 여부를 따져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유대인들의 충동질에 이미 군중심리에 빠져 버린 그들은 바울에게 달려들어, 바울을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나갔습니다. 스데반에게 그랬던 것처럼 바울을 성전모독죄로 쳐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1) 악한 이들의 악의가 가득한 거짓말
바울을 죽이려는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악의에 가득한 거짓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자들의 거짓말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악한 의도를 가진 악한 거짓말들은 수 없이 생산되고 독버섯처럼 퍼져갑니다.
진리를 외곡하고,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의도된 거짓말들이 참 많은 시대입니다. 특별히 미디어의 발달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들은 이런 악한 거짓말들을 더욱 강력하게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 ‘진리 안에 거하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처럼, 거짓말로 충동하는 거짓 선동에 부하내동하지 않도록, 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거짓과 진실을 확인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악한 이들의 악한 거짓 선동에 동참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더불어 성도들은 ‘사단의 속성인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게 이득이 된다고 거짓과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손해 보는 한이 있어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2. 하나님의 예비하심
이렇게 거짓말로 충동하는 이들과 그 거짓말에 군중심리에 빠져 흥분한 유대인들에 의해 바울은 곧 죽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바울은 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이방인의 군대 천부장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사도행전 21:31~32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본문에서 주목할 단어가, ‘급히’와 ‘달려 내겨가니’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시기 위해 천부장과 로마의 군대를 사용하십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갑니다.’
악한 이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로 선동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늘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베드로전서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시편 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편 121:1~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과 환경 가운데 처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하던 로마의 천부장을 통해서도 바울을 지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이 세상의 그 어떤 손 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담대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3. 간증의 힘
천부장에 의해 군중들의 손에서 벗어난 바울이 영내로 들어가기 전에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22장 1절에서 21절까지가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바울이 전에 교회를 박해하던 것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만난 예수님 이야기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의 회심 장면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26장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기록할 일들이 굉장히 많을 텐데 굳이 같은 내용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런데 여기에 위대한 복음 증거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증의 힘” 또는 “서사의 능력”입니다. “storytelling”의 가치입니다.
이번 연구 월 기간에 읽은 책 가운데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옥스퍼드대학교 석좌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사람입니다. ‘지성의 제자도’라는 책으로 유명한 저자입니다.
책의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절대가치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바로 ‘서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서사’ 즉 ‘삶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뿐만 아니라 전 세대를 걸쳐서 가장 강력한 복음의 도구입니다.
‘내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이야기’는 ‘성경을 다 알아서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변증’ 보다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우리가 전도의 현장에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논쟁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피전도자와 논쟁을 하면 절대로 그 사람은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쟁에서 전도자가 지면, 피전도자는 자신의 논리가 월등하다고 생각해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교회를 더욱 무시하게 됩니다. 반대로 그가 논쟁에서 지면, 기분 나빠서 교회에 안 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1) 서사의 힘
사실 성경은 모두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와 다윗 등등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의 삶의 현장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 그리고 역사하심의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데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능력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연약한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어떤 형태로든 끼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섭리 안에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자신의 삶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당신의 위대하신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굳이 우리가 아니어도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의 삶의 이야기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자들에게 ‘그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열 개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만 역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수 없이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전함으로 하나님의 드러내고 주님의 사랑을 전파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천부장의 허락 아래에서 자신의 삶에 간섭하신 하나님을 드러냈듯이,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을 늘 준비해서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연약하고 천한 우리의 삶에 굳이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더 없이 놀라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경험한 은혜들을 기억하고 전하는 준비와 훈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